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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홍냥방랑기

[세상구경] 제주도여행 - 두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나는.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걷는 것도. 그저 그것에 대한 동경이 있을 뿐.
움직이는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한라산을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계획로라면 12월 31일  나는 한라산을 올랐어야 했다. 
순전히 이건 드라마의 영향이었다.  < 내이름은 김삼순>

비록. 나는 나를 뒤쫓아와 미역국을 끓어주고 다리를 주물러줄 남자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한라산에서 서른을 맞이하면. 좀 다를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으니까.

사실 그래서 난 작년 1월 1일 하모양에게
올해 12월 31은 함께 한라산에 올라가자~  라고 약속을 해버렸었다.

그런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회사일정이 바쁘다보니.
결국 1월에...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제주도에 간건 사실 순전히 한라산에 가고 싶어서라고 해도 맞을 거다.

여행의 둘째날.
어차피 저질체력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때문에 겨울날 백록담까지 올라간다는 무모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었다.
대신. 영실코스 등상 ~ 윗세오름 도착 ~ 어리목코스 하산 의 계획을 
오후 1 이전에 끝낸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계획이 있었을 뿐.
왜냐면. 우린  2시 배를 타고 마라도를 가는게 둘째날의 두번째 계획이었으니까....ㅋ

그러나.  아침부터. 비는 내리고. 우린 피곤했고.  숙소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한라산은....안가도 괜찮을거야..."
" 맞아. 비오니까 아무도 안올라걸꺼야.."
" 그래도 일찍 일어났으니까  영실코스 입구만 가볼까? 아무도 없으면 그냥 돌아오면 되잖아..."
" 우리에게 마라도라는 두번째 계획도 있어...지금 8시 넘어서. 여기 가면 마라도는 못간다고."
" 맞아 맞아. 아쉬우니까 딱 입구만 한번 가보는거야...."


그렇게 도착한 영실 입구.
사람들은 올라가고 있었고. 이미 도착한 우리는. 눈 내린 산에 이미 신이 나 버렸고.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벌써 산 아래 와버렸은걸. 이라는 생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영실코스의 시작은 주차장에서 부터다.
  주차장과  등산로 입구까지의 길은 꽤 멀다.
  아마 눈이 오지 않았더라면,  차를 몰고 올라갈 수도 있을지도. 

  바닥은 어제 내린 눈이 얼어버린 곳과. 오늘 아침에 내린 비로 살짝 녹아 질척거리는 아스팔트. 

 
  

   아스팔트로 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사실 나는 여기까지도 힘들었다.  
   하지만. 삼순이가 올랐던. 산.  그래서 "내이름은 김희진이다." 를 외치던. 그 산이 아닌가.
   나는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있는 매점이 윗세오름까지 가는 길의 마지막 매점이란다. 
   여기서 아이젠을 하나 사서 신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신이 났다. 사방에 하얗게 내린 눈.
   앞사람의 흔적이 아니라면 길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행로.
  
   20살 때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에 일주일 정도 머물때. 
   절 뒤에 있는 암자에 오르던 길 이후로 내가 본 최고의 눈풍경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영이한테  영상통화하면서 눈 보여주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가 산에 있음을 알라고. 수다 떨면서 올라갔더랬다.
 
 그러나 산이 약간 가팔라지기 시작하자 몸에서 즉각 반응이 왔다. 
 후들거리는 다리. 놀란 가슴..  덜덜 떨리는 손.
 몸이 놀란게다.  주인님이 평소에 안하던 짓한다. 
 미리 준비해온 초코파이를 먹고,  과자를 먹고, 물을 마시고,  5분마다 한번씩 쉬어도. 
 몸의 반항은.  멈추지 않았다. 
 

 " 먼저 올라가.... 너네는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난 올라가다보면. 어디선가 만나겠지...
    우리가 다시 만나면 같이 내려오자..."

결국 친구들을 먼저 올려보냈다.
사실. 천천히 내 페이스로 가면  그냥 갈 수 있을것 같았다.  내가 체력이 딸리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잘 다독거리면서 올라가면 분명 말을 들어줄거니까.

근데 나 때문에 친구들이 올라가면서 자꾸 뒤돌아보는게 걸렸다.
이렇게 힘든 상황인데.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는것 같아 미안하고. 신경쓰이고.
신경쓰이는거 떄문에 더 힘든거 같고.  

17에 만난. 많은 걸 공유한, 별로 부끄러울 것 없는 친구들인데도.
그냥. 그랬다.  그래.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이상한 곳에서 훌쩍 자라있었던게다.

친구들을 보내고. 나는 본격적으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50걸음만 가면 쉴 수 있어.  봐봐 저 꼬마들도 올라가자나~
입사훈련으로 지리산 갈 때. 충분히 마저 올라갈 수있었음에도 넌  포기했자나?
포기하는 너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왜. 내가 하기 싫은 힘든 일을 해야해. 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별 애정없이. 어렵지 않게 취직하고. 별로 기쁘지도않으면서 그냥 취직해야될 때가 된거라는 생각에
맘에 들지 않는 곳에 입사해서.  지리산을 그렇게 포기해버렸던거야.  니 태도가 그런거였다구.

근데.  그렇게 포기해놓고. 내내 찜찜해했잖아.  니가 지리산을 포기할 때 마음으로 회생활을 하고.
또 그런 마음으로 일상을 사니까. 결국 다니기 싫다고 생각하면서. 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3년을 넘게 다니고.  이젠. 경제학과 졸업생  ㅇㅇㅇ 보단  xx IT회사직원 ㅇㅇㅇ  이 더 익숙하잖아.
지금 내 정체성은 회사원인데. 니는 또 쉽게 포기하려고 하고 있잖아..행복을 찾아 멀리 헤메는 미치르와 치르치르처럼.
정말로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중요한건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마인드의 문제라고. 이렇게 사는건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더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다는거...
지금 여기는. 니가. 그 때 포기한 그 순간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되는거야.   올라가라구!  포기하지 말고 올라가라고!  친구들도 모두 올라갔잖아.



아뿔사.  그러나 다른 난관이 하나 더 있었으니. 
우리의 비상식량이 들어있던 가방을 친구들이 나 편하게 해준다고 들고 올라가버린것이다.

내 주머니엔 물 한병만 덩그라니 있는게 아닌가.
아무리 의지도 좋고. 뭐도 좋지만.  난 이대로 가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포기해야 하나. 내 저질체력을 인정하고. 난 그냥 다시 대충과 게으름의 세계에 안주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대화소리...

" 아. 힘들어. 우리 한라산 밟아 봤는데 그만 내려갈까?"
" 그럴까?  힘드네.  그럼 그러자....."

나도 모르게 나는 몸을 잽싸게 돌리고 물었다.

"저....혹시 내려가시나요?  내려가시는거면, 남는 귤이나 초콜렛이라도 좀................"
최대한 불쌍해보이게. 울먹울먹. 아..좀 줘...주란 말이야....

"아..네. 귤 좀 있어요 드릴께요."
"아. 아가씨 오이 좋아해요?  오이 줄까?"

" 네  !!!!!!!!!!!!!!!!!!!!!!!!!!!!!!!!!!!!"

그렇게 해서 얻은 오이 한개와 귤 5개.
갑자기 마음이 너무 그득해졌다.  비록 산은 험하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부탁( 아니 구걸인가?) 을 했다는게 스스로 약간 대견스러웠고.
그 마음은 또 다른 자신감이 되어.  나에게 힘이 되었다.
물론  무엇보다.  오이가 정말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난 이제 멈추지 않고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심하게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눈보라가 날려 앞사람도. 뒷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발자국에만 의존해서 가야했다. 
한발자국만 잘못 내딪으면 낭떨어지인 길도 있었고.
농담같겠지만. 내가 날아가버릴것만 같은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내가 대견하다고 느끼고 싶었고.
올라가는 혹은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그곳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취해서 올라갔었던듯 싶다.


 



 

도착한 그곳에는.  라면이 있었고, 앉을 곳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비록. 내가 못올라올거라고 생각해.  내 삼각김밥까지 다 먹어버린 후였지만.
내가 가니까  자기들도 힘들면서 라면도 사다주고. 이것저것 챙겨주었던 고마운 친구들....

그렇다. 나는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뿌듯함.  정말 오랫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난 어릴 적엔 나를 좀 엄하게 다그치는 편이었어서 어느정도 이루면,  뿌듯함을 느끼기보단 자책을 많이 하던 아이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그런 나를 반성하고, 나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지려고 노력을 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나의 에고와 대충 협상한 상태랄까?

그래서. 노력해야 하는 목표를 세우지도 않고,  결과적으로는 나를 자책할 건수를 만들지 않고,
단편적인 즐거움(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안다던가.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한다던가) 을 느끼면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에  그저 만족하는 삶.
아픈 고민이나 실패도 없지만, 대단한 즐거움이나 뿌듯함도 없는. 그런 삶.

그런 일상 속에.  내가 윗세오름에서 느낀 뿌듯함은.  진심으로 신선한 감정이었다.
마치 마약처럼.     ( 백록담에라도 올라갔음 아주 난리났겠다. ㅋ)

어리목으로 내려오면서.. 너무 신나서 그만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인증샷 찍는걸 까먹었다.


 

 우리가 하산코스로 선택한 어리목코스는 영실코스보다 약간 길기는 했지만
 훨씬 편안한 길이었다.  
 영실로 올라가는 우리 뒤에서  영실코스 매표소 아저씨가 '어리목으로 가지..' 라고 중얼거린 이유가 있었던게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엄청 넘어지면서 내려왔다.  가벼운 마음과 상관없이 다리에 힘은 풀려버렸고,
 나는 걷기도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래도 신났고. 즐거웠고.  등산이. 좋아졌다.

 오후 3시쯤  산밑에 도착한 우리는.  마라도 는 물론 다른 유명한 관광지를 모두 뒤로 하고
 제주도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탄산온천" 행을 택했다. 

 

 온천을 즐기고 나오니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우린  그랑빌 펜션 언니에게 추천받은 
 " 제주 미향"  이라는 음식점에 가서
 갈치상차림 이란 메뉴로 피로를 풀었다.

 

갈치회
오분작뚝배기
갈치구이
갈치조림
부침개

 아침도 간단히 라면. 점심은 간편하게 라면.을 먹은 
 상태였으니.. 꼭 갈치회가 아니더라도 맛있었겠지만
 이건. 갈치회는 정말 맛있었다.

  여행의 즐거움의 최고봉은...역시 음식이다.!

 우리의 여행 두번째 날은 이렇게
 평화롭게. 끝나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