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22시간 정도 후면 32살이 된다. 애매한 나이.
아마도 나는 42살이 되어도 애매한 나이. 라고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애매하다' 라는 건 어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어떤지 말할 수 없을 때 쓴다고 볼때
난 평생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난 기준이 없기 때문에. 훗.자조적.
요즘 근 한달동안 매일 밤 개꿈이다.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급하게 3개월 동안 인생을 정리해야 한다거나
혹은 목적지를 뻔히 알면서 그 길로 차마 얼굴도 돌리지 못하고 딴 길로 끊임없이 방황하거나
내 맘과 달리 뭔가를 오해받거나 억울한 상황에 쳐하거나.
'이러면 안되는데...' 라고 나를 자책하는 꿈.
표면적인 이유는 지금하고 있는 초초초초 소규모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고, 또 다른 표면적인 원인은 아마도 약간의 요요때문일게다. 예상은 했지만 울트라 캡숑의 연말 송년회에서 절제없이 먹어댄 탓에 과거로 1/3 쯤 돌아가버렸다. 내 몸은 정말 솔직하다.
하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요즘 스트레스가 되는 '표면적인' 이유고
나는 무의식이 보내는 사인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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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2010년 봄이 옴과 동시에 내 인생에도 봄날이 찾아왔다.
나의 일상은그 어느때보다 평온하다.
가족들 사이에 큰 문제도 없고 (물론 뭐 소소한 문제들이야 늘...컥...)
친구, 회사 사람들. 인간관계에 별다른 문제 없다.
회사일도 그럭저럭 하고 있고, 평가도 생각보다 잘 받은걸 보면 1년을 대충살진 않은거 같다.
이 모든 편안한 마음의 근원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연애를 내가 할 줄이야.
끊임없이 나를 검열하고 분석하고 보내던 20대를 끝내고 30대를 시작하면서
나는 열병처럼, 정답같은 사람을 만났다. 놀라고 당황하며 몇 년만에 달뜬 설렘을 느꼈고
내 인생의 마지노선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선택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었다.
길고 긴 갈등과 방황. 수고했다고. 힘들었겠노라고. 참 잘했다고 위로받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비로소 내 방황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던 큰 기대는 소리 없이 사그라들고
시든 꽃처럼 30대를 숨죽여야 하는 건가 싶어 크게 한숨을 내쉬던 아련한 봄날에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 우연히도.
그 사람은 내가 찾던 정답이 아니었고
내가 연애란걸 하자고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엔 지나치게 밝았다.
내 안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그는 너무 온전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필연적인 선택.
그리고 의외로 나는 그 사람과 세 개의 계절을 보내고 이제 겨울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나는 더이상 나를 분석하고 증명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말랑말랑한 문자를 주고 받고, 로맨틱 코메디를 즐겨보고 별일아닌 우스갯소리에도 깔깔거린다.
내가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실존한다는 걸 매순간 느끼게 해준다.
하루에 100번도 넘게 묻고 또 물어도 그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긍정해준다. 나를 향한 무한 신뢰는 날선 나를 잠재운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편안함.
이대로 더이상 나를 들여다보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상처투성이 못난이.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바보 멍충이.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들.
일기, 생각. 여행. 블로그...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한 작위적 행동들을 벌이지 않아도 기댈 곳이 있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추운 겨울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는 따뜻함.
하지만 또 다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요즘 악몽을 꾼다는 걸.
타인의 인정에 기댄 편안함은 언젠가 모래성처럼 사라질 것이다.
잠들어 있는 날 선 나는 결국 언젠가 깨어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나는 다시 깊은 어둠으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의 신뢰가 변한다면 나는 쉽게 무너질 것이고.
그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디로 가지 않는다.
찾았다. 내 불안은 그거다.
내가 스스로 다듬고 컨트롤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내 발목을 잡을것이다.
내 무의식은 자꾸 사인을 보낸다.
스스로 마무리를 잘 하라고. 이제 다 왔는데 왜 자꾸 딴 길로 가냐고.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허둥지둥 거리고 만다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 심연에서 부터의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내가 생각을 멈췄던 지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 한 때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 내 인생에서의 포지션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그 아이는 내게 기정이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내가 잡아야 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도 된다고, 내 판단을 믿어도 된다고.
나도. 누군가에게 꽤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고 알게 해주고 거품사람 사라진 녀석은
딱 그만큼으로 내 인생에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을 주었다.
내가 기정이의 손을 잡았던 것도 내 무의식이 보내는 사인에 흔쾌히 응했던 결과.
아직도 명확히 설명은 못하겠다. 내 마음이 왜 그에게로 향했는지.
하지만 내 무의식을 믿고 선택한 그는 그 자체로 내게 봄날이고 선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선물을 영원히 가지고 있고 싶다.
서른 두살의 나는
이제 꿈에서 깨어나 다시 한걸음 나아가야 할 때다.
결국 내가 극복해야할 내 문제. 날선 나는 타인의 신뢰에 기대어 숨긴다고 사라지는게 아니다.
내가 나에게 신뢰를 보낼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좋은 사람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더이상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 나에겐 기정이가 있으니깐.
나에게 필요여한 건
내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용기.
나를 믿자. 그리고 믿음에 기반한 선택이 내 삶을 긍정적 방향으로 바꾸는
실질적 경험을 통해 나를 다시 신뢰하고 긍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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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라 2011년. 내가 곧 잘 살아주마~
P.S 2010 년의 마지막 출근을 위한 수면시간이 4시간도 안남았지만 오늘밤은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다.